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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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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20 음모는 1944년 7월 20일, 독일 국방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반나치 세력이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고 나치 정권을 전복하려 했던 사건이다. 1930년대 나치 집권 이후 히틀러의 독재와 전쟁 정책에 반발하여,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히틀러가 있는 볼프스샨체에 폭탄을 설치했으나, 히틀러는 살아남았다. 이후 반란은 진압되었고, 관련자들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나치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지만, 일부 연루자들이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논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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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 음모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마르틴 보르만, 헤르만 괴링, 브루노 뢰르처가 손상된 회의실을 조사하는 모습
마르틴 보르만, 헤르만 괴링, 브루노 뢰르처가 손상된 회의실을 조사하는 모습
목표아돌프 히틀러 암살
정부 연속성 확보
서방 연합군과의 평화 협상
위치볼프스샨체, 동프로이센
베를린
날짜1944년 7월 20일
실행 주체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에르빈 폰 비츨레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기타
결과히틀러, 경미한 부상으로 생존
군사 쿠데타, 5시간 이내 실패
7,000명 체포; 4,980명 처형 (음모 가담자 200명 포함)
전통적인 군대 경례, 나치 경례로 완전 대체
사상자4명 사망, 20명 부상
교전 세력
저항 세력검은 오케스트라
정부군나치 독일
지휘관
저항 세력루트비히 베크
헤닝 폰 트레스코프
에두아르트 바그너
오이겐 볼츠
알브레히트 폰 베른슈토르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정부군아돌프 히틀러
빌헬름 카이텔
발터 바를리몬트
알프레트 요들
피해 규모
저항 세력처형 약 5,000명
체포 약 5,000명
정부군히틀러는 타박상, 화상, 고막 손상 등의 경상
속기사 하인리히 베르거는 양쪽 다리를 잃고 즉사
육군 참모본부 작전과장, 총통 부관 하인츠 브란트 대령은 한쪽 다리를 잃고 2일 후 사망
공군 참모총장 귄터 코르텐 대장은 복부에 중상을 입고 2일 후 사망
총통 부관 루돌프 슈문트 중장은 허리 부위 중상으로 10월 1일 사망
나머지 참석자들도 중경상

2. 배경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독일은 빠르게 일당 독재 체제로 전환되었다. 나치는 사회 전반에 걸쳐 통제력을 강화했지만, 독일 국방군, 특히 전통적인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육군 내부에서는 나치 정권에 대한 반감이 존재했다.[10] 히틀러는 육군을 "길들이기 어려운 투견"이라 부르며 경계했고,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등을 통해 국방군을 장악하려 시도했으나 이는 오히려 군부 내 반나치 정서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치의 독재와 군사적 모험주의가 독일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 우려한 일부 군 장교들과 민간인들은 히틀러 제거를 목표로 비밀리에 저항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기 저항 운동의 중심에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루트비히 베크와 아프베어(군사 정보부)의 한스 오스터 등이 있었다.[10] 이들은 1938년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병합 시도 당시, 전쟁 발발을 막고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첫 쿠데타를 계획했다.[75] 이 계획에는 에르빈 폰 비츠레벤, 에리히 회프너 등 군 고위 장교들과 카를 괴르델러와 같은 민간 정치인도 가담했다.[11][77][78][79] 그러나 영국프랑스뮌헨 협정을 통해 히틀러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쿠데타의 명분이 사라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13][83]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특히 1941년 시작된 독소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 제거 계획은 다시 추진력을 얻었다. 동부 전선의 중앙 집단군 참모였던 헤닝 폰 트레슈코프 대령은 새로운 저항 그룹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 등과 협력하며 군대 내 저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은 1943년 여러 차례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으나, 폭탄 불발이나 히틀러의 일정 변경 등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4][84][85][86]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저항 세력은 히틀러 제거와 전쟁 종식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음모에 가담한 인물들의 동기는 다양했다. 다수는 독일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16][17] 일부는 나치 정권 하에서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귀족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인과 전쟁 포로에 대한 나치의 잔혹 행위가 독일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도덕적 분노와 전쟁을 끝내려는 열망도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18] 이처럼 다양한 배경과 동기를 가진 이들은 히틀러 정권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모였다.

2. 1. 반나치 세력 형성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며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나치는 정계, 관료, 경찰 등 거의 모든 사회 분야를 통제했지만, 독일 국방군, 특히 육군 내 일부 장교단 사이에서는 나치에 대한 반감이 존재했다. 헤르만 괴링이 지휘하는 공군이나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해군과 달리, 육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공을 바탕으로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가진 보수적인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육군 내부의 잠재적 반발을 경계하여 측근에게 "그들은 길들이기 어려운 투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치는 국방군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1938년 소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의 재혼 상대가 과거 매춘 경력이 있다는 스캔들을 이용해 그를 사임시켰고, 이어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상급대장을 동성애자로 몰아 축출했다. 그 후 히틀러는 빌헬름 카이텔을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총장으로, 알프레트 요들을 작전부장으로 임명하여 국방군 지휘부를 나치 충성파로 채웠다.

이러한 나치의 국방군 장악 시도에 반발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노장들을 중심으로 반나치 세력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 육군 내에서 존경받던 루트비히 베크 육군참모총장이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10] 1938년,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병합 시도 당시, 전쟁 발발을 우려한 베크는 참모총장직을 사임했다.[75] 그는 후임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76], 아프베어(군사 정보부) 차장 한스 오스터 소장[77], 제3군관구 사령관 에르빈 폰 비츠레벤[78], 제23보병사단장 에리히 회프너[79] 등 반나치 성향의 장교들과 카를 괴르델러 전 라이프치히 시장[11] 등 민간인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계획했다. 이 계획에는 아르투어 네베와 같은 친위대 간부도 가담했다.[80] 계획은 히틀러를 제거하거나 체포한 뒤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총선을 통해 정치를 정상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히틀러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81][82][75] 그러나 영국프랑스뮌헨 협정을 통해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을 용인하면서 쿠데타의 명분이 사라져 계획은 중단되었다.[13][83] 초기 음모 그룹에는 군사 정보국 부국장 한스 오스터 소장, 전 육군 최고사령부(OKH) 참모총장 루드비히 베크, 전 제1군 사령관이자 전 서부 독일 육군 사령관이었던 에르빈 폰 비츠레벤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카를 괴르델러 전 라이프치히 시장[11],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12] 등 민간 저항 세력과도 연계했다.

1944년 7월 15일 기준 유럽 전선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특히 1941년 독소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국방군 내 반나치 음모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42년, 동부 전선 중앙 집단군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 원수의 참모였던 헤닝 폰 트레슈코프 대령을 중심으로 새로운 저항 그룹이 형성되었다. 트레슈코프는 중앙 집단군 참모부에 반나치 인사들을 체계적으로 규합하여 저항 운동의 핵심 거점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는 베를린 벤들러블록의 일반육군청장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이었다. 올브리히트는 독일 전역의 예비군을 지휘하고 독립적인 통신망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의 합류는 쿠데타 실행 가능성을 크게 높였다. 또한, 군부 내 저항 세력은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가 주도한 민간 저항 그룹인 크라이자우어 크라이스 등과 교류하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몰트케는 히틀러 암살보다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폭력적인 방식에 대해선 비판적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943년, 트레슈코프와 올브리히트는 히틀러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3월에는 히틀러가 스몰렌스크의 중앙 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전용기에 폭탄을 설치했으나 불발로 끝났고(작전명 섬광), 일주일 뒤 베를린에서 열린 노획 무기 전시회에서 루돌프 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를 이용한 자살 폭탄 테러도 히틀러가 일찍 자리를 뜨는 바람에 실패했다.[14][84][85][86] 이러한 연이은 실패는 음모 가담자들을 좌절시켰다. 트레슈코프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같은 고위 야전 사령관들을 포섭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중앙 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때때로 동조하는 듯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누구도 음모 사실을 게슈타포나 히틀러에게 보고하지는 않았다.

7·20 음모에 가담한 인물들의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다수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일부는 나치 정권 초기에는 협력했지만 전쟁 중 영향력을 잃자 귀족적 반감이나 권력 회복을 위해 음모에 가담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같은 인물들에게는 민간인과 전쟁 포로에 대한 나치의 만행이 독일과 군대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신념이 중요한 동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체적으로 이들은 자유 민주주의자, 보수주의자, 사회 민주주의자, 권위주의적 귀족, 심지어 공산주의자까지 포함하는 이질적인 집단이었으며, 히틀러 정권 타도와 조속한 전쟁 종결이라는 공통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16][17][18] 1944년 4월에는 슈타우펜베르크가 사회 민주주의자인 아돌프 라이히바인과 율리우스 레버를 통해 독일 내 독일 공산당(KPD) 잔존 세력과 접촉하여 협력을 모색하기도 했다.[19]

2. 2. 제2차 세계대전 기간

1933년 나치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에 취임한 이후, 유대인 차별 정책 등 가혹한 정책을 추진하는 나치에 반발하여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려는 개인 또는 그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및 나치 정권 하에서 독일 국방군과 나치당 및 히틀러의 관계는 복잡했다. 나치의 정책, 특히 독일의 재군비와 군비 확장에 찬동하는 장교들도 있었지만, 나치의 주장이나 정책, 특히 국방군에 대한 히틀러나 친위대의 영향력에 의문을 품거나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히틀러가 추진하는 군사력을 동원한 영토 확장 정책이 주변국과의 전쟁을 일으켜 독일의 패배를 초래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1938년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병합 시도 당시 계획된 쿠데타는 국방군 내 반나치 운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주데텐란트 병합이 영국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독일 육군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는 직위를 사임했고[75], 후임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76], 군사정보부 차장 한스 오스터[77], 제3군관구 사령관 에르빈 폰 비츠레벤[78], 제23보병사단장 에리히 회프너[79] 등 반나치 성향의 장교 및 민간인들이 모여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는 아르투어 네베와 같은 친위대 간부도 일부 참여했다[80]. 계획은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총선을 실시하여 정치를 정상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히틀러의 처리에 대해서는 살해[81], 체포 후 재판[82], 정신 이상자로 구금[75] 등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제안으로 열린 뮌헨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을 승인하면서, 쿠데타 계획은 명분을 잃고 중단되었다[83]. 이 초기 음모의 지도자들로는 오스터 소장, 베크 전 참모총장, 비츠레벤 전 사령관 등이 있었으며[10], 이들은 라이프치히 전 시장 카를 괴르델러[11]나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12]와 같은 민간 저항 인사들과도 접촉했다. 군부 내 음모자들은 크라이자우어 크라이스 등 비밀 그룹을 통해 민간 저항 단체와 교류했으나, 몰트케는 히틀러 암살에 반대하며 재판 회부를 주장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대중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반나치 세력은 활동을 중단하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며 전쟁이 장기화되고,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이 참패하면서 히틀러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반나치 세력은 다시 은밀히 세력을 키우며 히틀러 암살 기회를 모색했다. 7.20 음모 이전에도 여러 차례 히틀러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히틀러는 번번이 위기를 모면했다.

1942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중앙 집단군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 원수의 참모였던 헤닝 폰 트레슈코프 대령을 중심으로 새로운 음모 그룹이 형성되었다. 트레슈코프는 반나치 성향의 장교들을 중앙 집단군 참모부로 체계적으로 영입하여 군대 내 저항 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히틀러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 직접적인 행동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오스터와 트레슈코프는 효과적인 저항 네트워크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베를린 중심부 벤들러블록에 위치한 육군 본부의 책임자이자 독일 전역의 예비군과 독립적인 통신 시스템을 관리하던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이 합류하면서 쿠데타 실행 가능성이 높아졌다.

1942년 말, 트레슈코프와 올브리히트는 1943년 3월 히틀러가 스몰렌스크의 중앙 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할 때 비행기에 폭탄을 설치하여 암살하려는 계획(작전 스파크)을 세웠다. 그러나 폭탄은 불발했고[85], 일주일 뒤 베를린에서 열린 소련 노획 무기 전시회에서 루돌프 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 등을 동원한 자살 폭탄 테러 시도 역시 히틀러의 일정 변경으로 실패했다.[14][86] 이러한 실패는 음모자들을 좌절시켰다. 1943년 동안 트레슈코프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같은 고위 야전 사령관들을 포섭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중앙 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때때로 동조하는 듯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망설였다.[15] 하지만 이들 원수 중 누구도 음모 사실을 게슈타포나 히틀러에게 보고하지는 않았다.

음모자들이 연합국에 제시하려 했던 평화 조건 중에는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와의 국경을 1914년 독일 제국 기준으로 재확립하고 배상금을 면제받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독일 저항 세력 다수가 가졌던 대독일주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최소한 오스트리아, 알자스-로렌, 주데텐란트의 병합과 1918년 이후 폴란드에 할양된 영토 중 독일인 거주 지역의 재병합, 일부 해외 식민지 반환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유럽이 독일의 영향력 아래 통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폴란드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음모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대부분 1914년 국경 회복을 원했지만, 이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20] 프리드리히 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와 같은 일부 인사는 폴란드 전체를 독일에 병합하기를 원하기도 했다.[21] 이러한 영토 요구와 민족주의적 시각은 나치 독일과 싸우던 폴란드 망명 정부 입장에서는 히틀러의 인종차별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게 받아들여졌다.[22] 음모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조차 폴란드 침공 당시인 1939년에 "우리가 폴란드에서 체계적인 식민지화를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23][24]

1944년 6월, 연합군이 서부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고, 동부 전선에서도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 공세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음모 그룹('검은 오케스트라')은 히틀러를 제거하고 서방 연합군과 강화를 맺기 위한 계획을 서둘렀다. 이들은 쿠데타 실행 계획으로 '발키리 작전'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 무렵 음모에는 비츠레벤 원수, 베크 예비역 대장, 회프너 예비역 대장, 트레슈코프 소장 외에도 국내 예비군 일반군무국장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대장, 육군 통신부대 사령관 에리히 펠기벨 대장,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 파울 폰 하제 중장, 참모본부 조직부장 헬무트 슈티프 소장, 국내 예비군 참모장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수많은 장교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3. 발키리 작전

'발키리 작전'은 본래 히틀러 암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작전 계획이었다. 이 작전은 전쟁이 격화되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짐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예비 계획으로 수립되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외부 전선에서의 붕괴가 아닌, 내부에서의 혁명으로 체제가 무너진 경험이 있었다. 1918년 11월 수병 폭동에서 시작된 11월 혁명은 순식간에 빌헬름 2세의 퇴위와 종전으로 이어졌다. 나치 독일은 집권 초기부터 공산당 등 좌파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기에 비슷한 혁명 가능성은 낮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내부 불안 요인이 존재했다.

첫째, 연합군의 독일 본토 깊숙한 곳까지 이어지는 전략 폭격이었다. 1943년 7월의 함부르크 대공습(고모라 작전)처럼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대규모 폭격은 독일 국민의 저항 의지를 꺾고 행정 및 치안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숨어 있던 반체제 세력이 활동을 개시할 위험이 있었다. 둘째,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이 점령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점령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노동력은 독일에 대한 불만이 컸으며, 감시가 소홀해지면 언제든 봉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이러한 불안 요인이 복합적으로 존재했다. 베를린 인근에는 중요 산업 시설이 밀집해 있었고,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끌려온 해외 노동자들의 거주 구역이 크게 늘어난 상태였다. 연합군이 대규모 폭격과 함께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독일의 심장부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고려되었다.

발키리 작전은 바로 이러한 비상사태 발생 시, 국방군 병력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치안을 회복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작전에 필요한 병력은 주로 후방의 예비군 조직이 담당하게 되었다. 전선의 야전부대를 후방 치안 유지에 투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예비군은 후방에서 신병을 훈련시키고 부상병이나 휴가병을 관리하여 전선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으므로, 이들이 작전의 주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예비군이 유사시 후방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는 향방작계와 유사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작전 발동은 원칙적으로 총통의 직접 명령에 따르지만, 통신 두절 등 비상시에는 예비군 총사령관의 명령으로도 발동될 수 있었다. '발키리(Walküre|발퀴레de)'라는 작전 지령이 내려지면, 각 부대는 사전에 지급받은 봉투를 열어 지정된 목표 지점을 확보하고, 예비군 총사령관의 추가 지시에 따라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전시 비상 상황을 대비한 합리적인 조치였기에 히틀러 역시 발키리 작전의 준비를 승인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베크를 중심으로 한 반나치 세력은 이 발키리 작전을 역이용하여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핵심은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동프러시아의 총통 지휘소인 볼프샨체에서 폭탄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제거되면, 아직 음모 가담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예비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을 통해 발키리 작전을 발동시켜 베를린의 예비군을 동원한다. 동원된 병력으로 나치당과 SS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고 정부 기관을 장악한 뒤, 루트비히 베크를 국가 원수로 추대하고 연합군과 강화를 모색하며 소련의 진격을 막는다는 구상이었다.

암살에 사용될 폭탄은 국방군 정보부(Abwehr) 사령관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비밀리에 확보한 영국제 플라스틱 폭탄이었다. 이 폭탄은 파편 효과보다는 폭발력 자체로 살상하는 방식이었으며, 금속 탐지가 삼엄한 볼프샨체 내부로 반입하기 용이했다. 기폭 장치로는 시한 장치가 사용되었는데, 유리 캡슐을 깨뜨리면 내부의 황산이 철사를 녹여 약 10분 후 뇌관을 작동시키는 방식이었다.[75][91][92]

암살 실행자로 지목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1943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오른쪽 팔 전체와 왼쪽 손가락 두 개, 그리고 왼쪽 눈을 잃은 상태였다.[87][88] 이러한 신체적 장애 때문에 오히려 경계 대상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히틀러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군의 제대 권유를 거부하고 1944년 6월 국내 예비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히틀러를 직접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89] 그는 불편한 몸으로 시한 장치의 캡슐을 깨뜨리는 정교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매일 연습을 거듭해야 했다. 그의 직속상관인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은 음모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슈타우펜베르크 등의 계획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90]

4. 경과

1944년 6월, 영미군이 서부 전선에서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동부 전선에서도 소련군바그라티온 작전 공세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던 '검은 오케스트라' 그룹은 히틀러를 제거하고 영미군과 강화할 계획을 서둘렀다.

이 무렵 그룹에는 비츨레벤 원수, 베크 예비 대장, 헬프너 예비 대장, 트레스코우 소장 외에도 국내 예비군 일반 군무국 국장 올브리히트 대장, 육군 통신 부대 사령관 펠기벨 대장,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 하세 중장, 참모 본부 편성 부장 슈티프 소장, 국내 예비군 참모장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많은 장교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암살 실행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맡게 되었다. 그는 옛 뷔르템베르크 왕국 귀족 출신으로, 1943년 4월 북아프리카 전선튀니지에서 부상하여 왼쪽 눈, 오른팔,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87][88] 이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계가 상대적으로 느슨했고 신체 검사도 거의 받지 않았다. 1944년 6월 20일 국내 예비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히틀러와 직접 만날 기회가 늘어났다.[89] 그의 상관인 국내 예비군 사령관 프롬 상급대장은 그룹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계획을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었다.[90]

암살에는 약 1kg의 독일제 플라스틱 폭탄 2개가 준비되었고,[91] 영국에서 노획한 연필형 기폭 장치(Pencil detonator, 시한 장치)가 사용될 예정이었다.[92][75] 슈타우펜베르크는 폭탄을 가방에 넣어 다니며 실행 기회를 엿보았다.

1944년 7월 초, 슈타우펜베르크는 여러 차례 히틀러와의 회의에 폭탄을 소지하고 참석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7월 6일 베르히테스가덴의 베르크호프에서는 슈티프 소장이 실행하기로 했으나 실패했고,[93][94] 7월 11일에는 괴링힘러가 회의에 불참하자, 힘러까지 함께 제거해야 한다는 그룹 내부의 판단에 따라 계획이 중단되었다.[75][93][95]

7월 14일, 히틀러가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의 총통 대본영 '볼프스샨체'로 이동하자,[96] 슈타우펜베르크는 7월 15일 프롬 상급대장과 함께 볼프스샨체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75] 그는 볼프스샨체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지만,[97] 그곳에서 암살을 결행하기로 결정했다.[75] 슈타우펜베르크 등이 베를린을 떠난 사이, 벤들러가의 올브리히트 대장 등은 프롬의 부재를 이용해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여 베를린 일부 부대에 긴급 출동 태세를 내렸으나,[98] 이는 사전 발동된 유일한 사례였다.[95]

7월 15일 볼프스샨체 회의에도 힘러는 불참했다.[99]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에 연락하여 힘러 없이도 결행할 의사를 밝혔으나, 베크, 헬프너 등 장군들은 중단을 명령했다.[75] 슈타우펜베르크와 퀼른하임 대령은 장군들의 지시를 무시하려 했으나 회의가 끝나 실행하지 못했다.[75] 베를린의 경계 태세는 "훈련이었다"고 둘러대며 해제되었고, 이 일로 프롬이 질책을 받았지만 쿠데타 의도는 숨길 수 있었다.[100][101][102]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퀼른하임과 다음 기회에는 장군들의 의향과 상관없이 결행하기로 합의했다.[103][75]

7월 19일, 다음날인 20일 오후 1시 총통 대본영 작전 회의에 예비군 참모 파견 명령이 내려져 슈타우펜베르크와 부관 헤프텐 중위가 출두하게 되었다. 프롬은 소집되지 않았다. 이처럼 7월에는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연기되었다.

4. 1. 볼프샨체

1944년 7월 20일 오전 7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부관 베르너 폰 헤프텐 중위와 함께 랑스도르프 비행장에서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으로 출발했다. 오전 10시 15분 라스텐부르크에 도착하여 20분 뒤 총통 지휘소인 볼프샨체(Wolfsschanze, 늑대의 소굴)에 도착했다. 볼프샨체에는 3개의 검문소가 있었지만, 슈타우펜베르크는 무사히 통과했다.[104]

정오 무렵, 슈타우펜베르크는 카이텔 원수를 만나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의 국민척탄병 관련 보고서를 전달했다. 이때 카이텔은 히틀러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 예정이 있어 회의를 일찍 끝내야 하며, 장소가 변경되었다고 알렸다. 원래 회의는 지하 벙커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당일 재공사로 인해 지상의 목조 막사 회의실에서 열리게 되었다.[105] 이는 폭탄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카이텔과 회의실로 가던 중, 슈타우펜베르크는 볼프샨체의 통신 책임자이자 반나치 내부 협력자였던 에리히 펠기벨 장군을 만났다. 펠기벨은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빈다"고 말하며 암살 계획의 성공을 기원했다.

회의실에 거의 도착했을 때, 슈타우펜베르크는 모자와 벨트를 두고 왔다며 잠시 대기실로 돌아갔다. 오후 12시 32분, 그는 가방 속 영국제 시한폭탄의 캡슐을 깨뜨려 10분 후 폭발하도록 설정했다.[75][91][92] 시간이 촉박하여 준비한 두 개의 폭탄 중 하나만 기폭 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75] 대기실에서 나온 슈타우펜베르크는 카이텔에게 지각을 질책받고 사과했다.

오후 12시 36분, 회의실로 들어가기 직전 슈타우펜베르크는 통신 교환수에게 베를린에서 급한 전화가 올 것이니 즉시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회의장을 빠져나갈 명분을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다. 당시 회의실에는 히틀러를 포함해 총 25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돌프 호이징거 중장이 동부 전선 상황을 브리핑하는 중이었다.[106]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 호이징거의 부관 하인츠 브란트 대령과 공군 참모총장 귄터 코르텐 대장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폭탄이 든 가방을 히틀러 근처의 육중한 참나무 테이블 다리 안쪽에 밀어 넣고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107]

1944년 7월 20일 회의 참가자 이름과 위치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가 나간 직후, 브란트 대령이 지도를 더 잘 보기 위해 몸을 움직이다가 발에 걸리는 가방을 발견했다. 그는 가방이 히틀러에게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테이블 다리 바깥쪽으로 옮겨 놓았다. 이 행동은 결과적으로 두꺼운 테이블 다리가 폭발 충격으로부터 히틀러를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75]

오후 12시 42분, 호이징거가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시키지 않으면 파국이..."라고 말하는 순간 폭탄이 폭발했다.[108][109]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붕에 큰 구멍이 뚫리고 창문이 모두 깨졌으며, 화염과 연기가 가득 찼다. 폭발 순간 펠기벨의 사무실에 있던 슈타우펜베르크는 폭발음을 확인하고 펠기벨과 악수한 뒤 헤프텐과 함께 볼프샨체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며 '44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통과'라는 기록을 남기고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으로 향했다. 이동 중 헤프텐은 예비용 폭탄을 분해해 길가에 버렸다. 볼프샨체에 남은 펠기벨은 계획대로 통신선을 절단하여 총통 지휘소를 외부와 몇 시간 동안 고립시켰다.[75] 오후 12시 55분,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폭발 현장은 참혹했다. 속기사 하인리히 베르거는 양 다리를 잃고 즉사했다. 폭탄 가방을 옮겼던 하인츠 브란트 대령은 한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이틀 후 사망했다. 공군 참모총장 귄터 코르텐 대장은 복부에 중상을 입고 이틀 후, 히틀러의 수석 부관인 루돌프 슈문트 보병대장은 허리에 중상을 입고 10월 1일에 사망했다. 다른 참석자들도 대부분 중경상을 입었다. 히틀러는 폭발 충격으로 뒤로 날아가고 옷이 찢어졌으며,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양쪽 고막이 파열되고 팔에 나무 파편이 박혀 이후 팔 마비 증상을 겪는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기절한 히틀러는 회의실 밖에 있던 카이텔 원수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와 끌어냈다.

오후 1시 13분경, 볼프샨체에 남아 있던 펠기벨은 히틀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간접적인 표현으로 히틀러가 생존했음을 알렸다.[110] 이 소식은 베를린의 공모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처음에는 폭발의 원인이 연합군의 폭격이나 사전에 설치된 폭탄으로 추정되었고, 슈타우펜베르크 역시 폭사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통신 교환수와 카이텔이 슈타우펜베르크가 회의 도중 사라졌다고 증언하고, 검문소에서 그가 폭발 직후 볼프샨체를 떠났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하인리히 힘러가 현장에 도착하여 조사를 지휘했지만, 통신선 두절로 인해 즉각적인 추격이나 정보 전파는 불가능했다.

오후 4시경, 히틀러는 예정대로 볼프샨체를 방문한 무솔리니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는 파괴된 회의장을 보여주며 자신이 살아남았듯이 결국 추축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5시경 통신선이 복구되자 베를린 등지에서 반란 시도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장검의 밤 사건 때보다 더 잔혹한 보복을 다짐하며 격노했다.

7월 20일 회의 참가자 및 상태
번호이름직책/계급상태
1아돌프 히틀러총통생존 (경상)
2아돌프 호이징거육군 중장생존 (중상)
3귄터 코르텐공군 참모총장 (대장)사망 (7월 22일)
4하인츠 브란트육군 대령 (호이징거 부관)사망 (7월 21일)
5카를-하인리히 보덴샤츠공군 항공병대장 (괴링 연락장교)생존 (중상)
6하인츠 바이트제네거육군 소령 (카이텔 부관)생존 (경상)
7루돌프 슈문트육군 보병대장 (총통 수석 부관, 육군 인사국장)사망 (10월 1일)
8하인리히 보르크만육군 중령 (총통 부관)생존 (중상)
9발터 불레육군 보병대장 (OKW 육군 참모부장)생존 (경상)
10카를-예스코 폰 푸트카머해군 소장 (총통 해군 부관)생존 (경상)
11하인리히 베르거속기사사망 (현장 즉사)
12하인츠 아스만해군 대령 (요들 참모)생존 (경상)
13에른스트 요한 폰 프레엔트육군 소령 (카이텔 부관)생존 (경상)
14발터 셰르프육군 소장 (OKW 전쟁사 부장)생존 (경상)
15한스-에리히 포스해군 소장 (해군 총사령관 연락장교)생존 (경상)
16오토 귄셰친위대 소령 (총통 부관)생존 (경상)
17니콜라우스 폰 벨로프공군 대령 (총통 공군 부관)생존 (경상)
18헤르만 페겔라인무장친위대 중장 (힘러 연락장교)생존 (경상)
19하인츠 부흐홀츠속기사생존 (경상)
20헤르베르트 뷔크스육군 소령 (요들 부관)생존 (경상)
21프란츠 폰 존라이트너독일 외무성 대표생존 (경상)
22발터 바를리몬트육군 포병대장 (요들 차장)생존 (경상)
23알프레트 요들육군 상급대장 (OKW 작전부장)생존 (경상)
24빌헬름 카이텔육군 원수 (OKW 총장)생존 (경상)



암살 시도가 실패한 주요 원인으로는 다음 세 가지가 지목된다.

# 회의 장소가 원래 예정되었던 지하 콘크리트 벙커가 아닌 지상의 목조 막사로 변경되어 폭발의 위력이 분산되었다.[134]

# 회의 시작 시간이 30분 앞당겨지면서 슈타우펜베르크가 준비한 두 개의 폭탄 중 하나만 기폭 장치를 작동시킬 시간이 있었다.[75]

# 브란트 대령이 슈타우펜베르크가 놓아둔 폭탄 가방을 테이블 다리 바깥쪽으로 옮기면서, 두꺼운 테이블 다리가 히틀러를 폭발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75]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인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만약 두 개의 폭탄을 모두 사용했거나, 가방이 원래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면 히틀러가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75]

4. 2. 베를린

오후 3시 45분,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이 베를린 인근 랑스도르프 비행장에 도착하면서 발키리 작전이 급히 개시되었다.[75][75] 오후 4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 파울 폰 하세 장군 등 반나치 인사들은 친위대 사령부 봉쇄를 시도했고, 올브리히트 장군은 국내 예비군 사령관 프롬 상급대장을 찾아가 예비군 동원을 요구했다.[75] 그러나 히틀러 생존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던 프롬은 증거를 요구했고, 마침 통신이 복구된 볼프스샨체의 카이텔 원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75] 이 통화 후 프롬은 반란 가담을 거부했다. 그 무렵 베크 전 육군 참모총장이 베를린에 도착했다.

1944년 6월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퀴른하임과 함께 있는 슈타우펜베르크


오후 4시 30분, 베크,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는 행동을 본격화하며, 슈타우펜베르크는 파리에 있는 사촌 케저 폰 호파커에게도 행동 개시를 지시했다. 이들은 다시 프롬을 설득하려 했으나 그는 거부하며 오히려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반란군에게 유리해 보였고, 결국 프롬이 체포되어 감금되는 처지가 되었다.[115]

오후 5시경,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러 온 친위대 장교와 병사들이 오히려 반란군에게 체포되었고, 반나치 세력은 베를린 시내의 나치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오후 6시에는 반란군 부대가 친위대와 보안국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후 6시 28분, 히틀러가 직접 라디오 방송에 나와 자신이 건재하며 음모자들에게 엄중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연설했다.[119] 이 방송은 반란 참여자들을 크게 동요시켰다.

한편, 베를린 경비대대장 레머 소령은 반란군의 명령에 따라 괴벨스 선전상을 체포하기 위해 선전부로 향했다.[117][120] 그러나 괴벨스는 기지를 발휘하여 레머를 히틀러와 직접 통화하게 했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레머는 즉석에서 대령으로 진급하며 반란 진압 명령을 받았다.[75][121] 비슷한 시각, 올브리히트는 크람프니츠 사관학교의 동원을 시도했으나, 이미 친위대 소령 오토 슈코르체니가 다녀가 충성을 다짐받은 학교장은 이를 거부했다. 올브리히트는 학교장을 감금하고 전차부대 출동을 강행했지만, 학교장은 탈출하여 티어가르텐의 승리의 탑까지 진격했던 전차부대를 설득해 복귀시켰다.

레머는 이제 반대로 반란군 체포에 나섰고, 히틀러 생존 소식이 퍼지면서 하세 장군 등은 더 이상 동조자를 찾기 어려워졌다. 계획 실패를 직감한 헤프텐은 관련 문서를 소각하기 시작했다. 오후 10시경, 반란군에 가담했던 일부 장교들이 돌변하여 주동자들을 체포했다.[124] 슈타우펜베르크는 도주를 시도하다가 남은 왼팔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감금되었던 프롬도 구출되었고, 친위대와 보안국을 포위했던 반란군 지휘관 헤르푸르트마저 히틀러에게 전화를 걸어 반란을 진압하고 있다고 보고하며 배신했다.

7월 21일 자정이 되자, 자신의 연루 사실을 덮으려던 프롬은 서둘러 군법 회의를 열었다.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올브리히트,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베크는 자살을 선택했다(실패 후 부하에게 확인 사살됨). 네 명의 장교는 국내 예비군 사령부(벤들러블록) 안뜰로 끌려나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아래에서 총살당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에스 레베 운저 하일리게스 도이칠란트!|해석=우리의 신성한 독일 만세!de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프롬은 절친했던 회프너 장군도 처형하려 했으나 차마 실행하지는 못했다.

오전 12시 30분, 처형 직후 슈코르체니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남은 생존자들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프롬, 회프너, 하세, 비츨레벤 등을 연행했다. 오전 1시, 히틀러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격앙된 목소리로 반역자들을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베를린에서의 반란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음모에 가담했던 많은 이들은 과거 나치가 권력을 잡는 데 기여했으며 히틀러의 초기 외교 정책 목표를 공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히틀러 정권을 귀족 통치를 포함하는 보수-권위주의 정부로 대체하기를 원했으며, 대중의 정치 참여나 민주주의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25]

4. 3. 파리

파리에서도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이들이 행동에 나섰다. 히틀러가 사망했다고 믿은 그들은 즉시 파리에 주둔 중이던 게슈타포친위대, SD 요원들을 체포하여 구금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주둔 게슈타포의 총책임자인 카를 오베르크를 체포하는 데 집중했다.

오후 6시, 서부전선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 원수는 반란 세력의 발키리 작전 개시 보고를 받았다. 클루게는 베크에게 전화를 걸어 히틀러의 생사를 물었고, 베크는 히틀러가 사망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클루게는 이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오후 8시경, 라 로슈 기용의 사령부로 발키리 작전을 수행하라는 지령이 내려왔지만 클루게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반란 동참을 주장하는 권터 블루멘트리와 한스 슈파이델은 클루게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때 호파커 등 반란 주도자들이 도착하여 이미 게슈타포를 비롯한 나치 요인들을 체포했다고 알리며 클루게에게 반란 동참을 강력히 권유했으나, 클루게는 끝내 거절했다. 서부전선 사령관인 클루게의 참여 거부는 사실상 파리에서의 반란 실패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후 클루게는 반란 가담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그들에게 몸을 피할 것을 권했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했다.

오후 11시 30분, 반란군은 약 1,200명에 달하는 게슈타포, 친위대, 보안대 요원들을 체포하여 형무소에 수감시켰다. 오베르크와 1940년부터 프랑스 내 게슈타포 조직을 구축한 실질적인 책임자 헬무트 크노헨은 파리의 콘티넨탈 호텔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7월 21일 오전 1시, 베를린에서 히틀러가 직접 반란 실패를 알리는 성명을 발표하자 파리의 반란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어 오전 1시 30분, 독일 서부 전선 해군 사령관 크란케 제독은 체포된 나치 요원들을 즉시 석방하지 않으면 해군 육전대 1천 명을 투입하여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위협했다.

오전 2시, 블루멘트리는 파리 군정 사령관 카를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 대장에게 그의 해직을 통보했다. 크란케 제독의 무력 진압 위협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파리 주재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가 중재에 나섰다. 오전 3시, 아베츠 대사는 오베르크와 스퇼프나겔 사이의 협상을 주선했고, 결국 체포된 나치 요원들을 모두 석방하고 반란군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파리에서의 반란은 종결되었다. 협상 타결 후, 반란군 장교들과 친위대 장교들은 함께 샴페인을 마시며 서로를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5. 결과

히틀러는 반란 가담자들을 남김없이 처형하라고 명령했고, 나치롤란트 프라이슬러 판사를 재판장으로 하는 인민재판소를 열어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체포된 이들 대부분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약 7,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중 약 5,000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135][136] 처형은 주로 플뢰첸제 형무소(Gedenkstätte Plötzensee)에서 피아노선을 이용한 교수형 등 잔혹한 방식으로 집행되었으며,[137][138] 히틀러는 그 모습을 '푸줏간의 돼지' 같다고 묘사했다. 처형 장면은 영상으로 기록되어 히틀러에게 보고되었으나,[75] 실제 관람 여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139][140]

초기 재판에서 비츠레벤, 펠기벨, 회프너, 하세, 헬도르프, 호파커 등 주요 가담자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네베는 도주했으나 결국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반란 진압 후 슈타우펜베르크 등을 즉결 처형했던 프롬 상급대장과 베를린 경비사령관 헤르푸르트 소장 역시 사건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프롬은 처형 소식을 듣고 "그럴리 없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클루게 원수는 파리에서의 반란 동조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아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고, 총통 본영으로 소환되던 중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했다. 롬멜 원수 역시 암살 시도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아 히틀러로부터 자살을 강요당했다. 롬멜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결국 독약을 마시고 사망했다. 다만 롬멜의 실제 가담 여부는 명확하지 않으며, 부관 슈파이델의 증언 외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고 사건 당일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스퇼프나겔 장군은 베를린으로 자진 출두하던 중 베르됭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두 눈을 잃은 채 치료받은 후 처형되었다. 동부 전선의 트레스코프 소장은 소련군과의 최전선 부근에서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반란에 가담했거나 동조했던 인물 중 살아남은 경우도 있었다. 반란 진압에 기여한 레머는 대령으로 승진했으나 전후 이집트로 도피했다가 체포되어 독일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블루멘트리트 장군은 혐의점을 찾지 못해 아르덴느 공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제23기갑사단 사령관 한스 폰 보이네부르크 중장은 고문에도 동료들이 함구하여 발각되지 않고 살아남아 종전 후 연합군에 항복했다. 린데만 상급대장은 간접적 지지 정황에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군에 복귀했다가 종전 후 항복했다. 슈파이델 중장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연합군에 의해 구출되었고, 전후 재건된 서독군에서 복무하며 반나치 회고록을 남겼다. 국방군 정보국장 겔렌 중장은 사건 연루 혐의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고, 전후 미국 CIA와 협력하여 서독 정보기관인 연방정보원(BND) 창설에 기여했다.

놀랍게도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고 알려진 친위대 내부에서도 가담자가 나왔다. 경찰 간부였던 헬도르프 SS대장과 네베 SS중장이 대표적이다. 헬도르프는 나치 통치 자체에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네베는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골수 나치였지만 권력 투쟁 과정에서 불만을 품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켓가든 작전 당시 연합군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한 비트리히 SS대장 또한 사건 전 롬멜에게 쿠데타 지지를 약속했으나, 히틀러 제거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고 사건 당일 연락을 받지 못했는지 혐의를 받지 않았다. 비트리히는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의 무능함을 비판하여 힘러로부터 사형을 구형받기도 했으며, 슈페어는 그가 나치 정권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대한 무조건적인 처형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으나, 동부 전선에서의 전쟁 범죄 연루 의혹도 있다. 이러한 친위대 장성들의 반기는 히틀러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말년의 의심증과 히스테릭한 반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반란과 직접 관련이 없었음에도 희생된 인물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민간인 반나치 인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반란 성공 시 수상으로 내정되었던 전 라이프치히 시장 카를 괴르델러, 사회주의자 율리우스 레버, 크라이자우 서클 회장 몰트케 백작 등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폭탄을 제공했던 정보국장 카나리스 제독과 부국장 오스터 장군도 처형되었다.

반면, 만슈타인 원수, 보크 원수, 구데리안 상급대장 등 일부 고위 장교들은 음모 가담 권유를 거절하면서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했다. 이러한 태도는 반란 가담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전후 슈파이델은 반란에 비판적이었던 룬트슈테트 원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슈타우펜베르크 가문 전체를 숙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설도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의 부인과 자녀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장남 베어톨트는 훗날 독일 연방방위군 장성이 되었다.

7·20 음모는 독일군 지도부 내에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의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감이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제3제국의 내부 균열을 드러내고 임박한 종말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트레스코프가 슈타우펜베르크에게 보낸 메시지처럼, 설령 실패하더라도 저항의 의지를 역사에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가담자들 사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암살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coûte que coûte|쿠트 크 쿠트프랑스어) 시도해야 한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베를린에서 행동해야 한다. 실용적인 목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이제 중요한 것은 독일 저항 운동이 세계와 역사 앞에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6. 연루자

7.20 음모가 실패로 돌아간 후, 나치 독일 정권은 연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과 숙청을 단행했다. 음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거나 연루되었다고 의심받는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체포되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사건 당일 밤, 국내 예비군 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은 자신의 연루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군법회의를 열어 음모의 핵심 인물들에게 즉결 처형을 선고했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그의 부관 베르너 폰 헤프텐 중위,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대장,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대령은 1944년 7월 21일 0시 15분경 베를린 벤들러블록(Bendlerblock)의 안뜰에서 총살되었다.[132]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은 자살을 허가받았으나 두 번 실패하자 프롬의 명령을 받은 병사에 의해 사살되었다.[130][131]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은 자결을 거부하고 재판을 원했기에 체포되었다.

게슈타포는 즉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여 음모 가담 의심자들을 체포했다. 체포된 용의자와 그 친척, 도주 방조자 등 연좌 구속된 인원은 600명에서 8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35] 또한 이 기회를 이용해 평소 반나치적 언행으로 알려진 약 7,000명이 체포되었다고도 한다.[135] 군 관계 용의자들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가 의장을 맡은 명예 법정(Ehrenhof)에서 군적을 박탈당한 뒤, 악명 높은 인민법정(Volksgerichtshof)으로 넘겨졌다.[136] 재판장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히틀러가 "우리의 안드레이 비신스키"라고 부를 정도로 형식적이고 매우 가혹한 재판을 진행했다.[136] 예를 들어 사형된 루트비히 폰 레온로트 소령은 사건 실행 전에 헤르만 요제프 베어레 신부에게 고해를 했다. 게슈타포의 고문으로 레온로트가 참회에 대해 자백하자, 베어레는 증인으로 인민 법정에 섰지만, 프라이슬러는 사전에 암살 계획을 알고도 통보를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베어레를 공범으로 간주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다.

8월 7일부터 시작된 재판에서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 등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다음 날인 8월 8일 베를린의 플뢰첸제 형무소(Plötzensee Prison)에서 피아노선을 이용한 잔혹한 방식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137][138] 이 처형 장면은 영상으로 기록되어 히틀러에게 보고되었으나, 히틀러가 실제로 관람했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139][140] 이후 볼프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 카를하인리히 폰 슈틸프나겔, 에리히 펠기벨, 카를 괴르델러, 아르투르 네베, 빌헬름 카나리스, 한스 오스터, 디트리히 본회퍼 등 약 200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잇따라 처형되었다. 재판과 처형은 1945년 2월 프라이슬러가 공습으로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독일 패전 직전까지 이어졌다.[141]

한편, 동부 전선에 있던 헤닝 폰 트레츠코프 소장은 7월 21일 수류탄으로 자결했고, 서부 전선의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음모 연루 의혹 속에 해임된 후 8월 19일 귀국 도중 독극물로 자살했다. 가장 유명한 장군 중 한 명인 에르빈 롬멜 원수는 부상으로 요양 중이었으나 연루 혐의로 1944년 10월 14일 자살을 강요당해 독약을 마시고 사망했다.

음모 연루자 및 관련 인물들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이름최후날짜비고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처형벤들러블록에서 즉결 총살
베르너 폰 헤프텐처형벤들러블록에서 즉결 총살
루트비히 베크자살자살 실패 후 사살됨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처형벤들러블록에서 즉결 총살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처형벤들러블록에서 즉결 총살
헤닝 폰 트레츠코프자살동부 전선에서 수류탄 자결
에리히 회프너처형인민 법정 재판 후 플뢰첸제 형무소에서 처형
에르빈 폰 비츨레벤처형인민 법정 재판 후 플뢰첸제 형무소에서 처형
볼프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처형인민 법정 재판 후 플뢰첸제 형무소에서 처형
귄터 폰 클루게자살서부 전선 사령관 해임 후 자살
카를하인리히 폰 슈틸프나겔처형자살 시도 실패 후 인민 법정 재판, 처형 (날짜는 원본 소스 외 정보일 수 있음)
에리히 펠기벨처형인민 법정 재판 후 플뢰첸제 형무소에서 처형
에르빈 롬멜자살 강요음독 자살
카를 괴르델러처형인민 법정 재판 후 플뢰첸제 형무소에서 처형
프리드리히 프롬처형음모 방조 및 비겁함 혐의로 총살
아르투르 네베처형인민 법정 재판 후 플뢰첸제 형무소에서 처형
빌헬름 카나리스처형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
한스 오스터처형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
디트리히 본회퍼처형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



이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음모와 관련되어 조사를 받거나 불이익을 당했다.


  •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는 부관이 트레츠코프의 사촌이었기에 음모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화를 면했다.
  • 히알마르 샤흐트 전 경제 장관은 연루 혐의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나 패전 직전에 석방되었다.
  • 작가 에른스트 윙거 대위는 서부 전선의 장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로 관련성을 추궁받고 군에서 해고되었으나, 히틀러 본인이 게슈타포의 체포 목록에서 제외시켰다는 설도 있다.
  • 루돌프 딜스 전 게슈타포 국장은 연루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의형제 관계였던 헤르만 괴링의 보호로 풀려났다.
  • 발터 도른베르거 소장은 후원자였던 프롬 상급대장의 숙청으로 인해 V2 로켓 개발 및 작전 지휘에 친위대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7. 평가 및 영향

히틀러는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극도의 인간 불신에 빠졌으며, "총통에게 반역하는 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일족까지 극형에 처한다"는 경고와 함께 관련자 색출과 숙청을 철저하게 진행했다.[143] 이로 인해 이후 히틀러에 대한 추가적인 암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방군 내에서도 나치식 경례가 의무화되었고, 이전까지 정치적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았던 해군에도 정치 장교가 배치되어 전선의 U보트 부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7월 20일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힐 것을 두려워한 장군들은 히틀러에게 직언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이는 독일군의 작전 수행 경직으로 이어졌다. 반면, 군부 내 방첩 활동은 강화되어 연합군의 정보 수집 활동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암살 미수 사건에 관여한 자들에 대한 숙청은 나치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4월 하순까지 계속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프리드리히 호스바흐는 만약 히틀러 암살이 성공했더라도 반란파가 정권을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143] 1944년 7월 20일 당시에는 히틀러에 대한 독일 국민의 지지가 여전히 높았고, 반대로 반란파는 대중적 지지 기반이 취약했다.[75] 실제로 히틀러 암살 미수 발표 후, 그의 무사를 축하하며 NSV에는 막대한 기부가 이어졌고,[144] 당시 일반 시민과 병사들의 일기나 편지 다수에는 히틀러의 무사를 기뻐하는 내용과 함께 반란파에 대한 분노와 경악이 기록되어 있었다.[145]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반란에 가담했다가 처형된 사람들의 유족들은 공무원의 중대 범죄자로 취급되어 연금이 지급되지 않아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52년경 이들은 전몰자로 인정받아 연금을 지급받게 되었다.[1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 사회에서는 한동안 이들을 배신자로 여기는 시선이 존재했으며, 1957년까지도 유족들이 "배신자의 아이"로 불리며 직장에서 험담을 듣는 경우가 있었다.[75]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나치즘에 저항한 실행자들로 재평가받으며 찬양받게 되었다. 현재 베를린의 옛 국방성 터(벤들러블록)에는 베크, 슈타우펜베르크, 해프텐, 올브리히트, 퀴른하임 등 처형된 5명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벤들러 거리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자리에는 독일 저항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그들이 처형된 뜰에는 저항을 상징하는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사건은 독일군 지도부 내에서도 히틀러와 그 측근들의 전쟁 지도력에 대한 깊은 의구심과 반감이 존재했음을 보여주었으며, 나치 독일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트레츠코프 소장은 암살 시도의 실질적 성공 가능성과 별개로, "독일 저항 운동이 세계와 역사 앞에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암살 시도의 역사적 의미를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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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서적 カーショー(2016年)
[141] 서적 クノップ(2008年)
[142] 서적 ヴェルナー・マーザー著「人間ヒトラー」や アントン・ヨアヒム・スターラー著「ヒトラーの最期」
[143] 서적 カーショー(2021年)
[144] 서적 カーショー(2021年)
[145] 서적 クノップ(2008年)
[146] 서적 クノップ(200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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